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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혹은 죽음의 미학

글 유명종(문화평론가)

 

 

  인류는 두 개의 예술사를 가지고 있다.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다. 그리스 로마 미술과 인상파 화가들, 그리고 마티스의 작품이 미의 예술이라면, 피카소와 베이컨, 데미언 허스트는 추의 예술의 계보를 잇고 있다. 넓게 보면 원동민은 후자에 가까운 작가이다. 그러나 좁혀 보면 이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면 그는 추한 것을 예술의 소재로 삼지만 결국엔 아름다움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처럼 원동민의 작업은 한편 한편이 아름다운 꽃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놀랍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들이 만든 꽃이다. 쓰레기봉투, 담배꽁초, 연탄재, 전투비행기, 구겨진 담뱃갑, 음식쓰레기, 버려진 꽃……. 작품 소재는 하나같이 하찮고 시시하고 쓸모없고 반인간적인 것이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생물학적으로 이미 죽은 것이거나, 효용성 면에서 기능을 다한 것, 또는 전투기처럼 태생적으로 대량 살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동민의 예술적 소재는 깨끗함이 아니라 더러움이고,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이다. 그리고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다. 원동민은 그 죽음을, 예술로 부활시킨다. 죽음을 수집하여(혹은 모아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컴퓨터를 통해 합성을 하여 지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낯설게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죽음을 생명의 궁극인 꽃으로 부활시키는 것이다. 추와 죽음의 예술화이다.

 

    원동민의 작업은 현실을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소재 하나 하나가 그대로 오늘의 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더 새로운, 더 빠른 소유와 소비를 충동한다. 쓰레기봉투, 전투기, 음식쓰레기, 버려진 꽃 등은 그러므로 욕망의 배설물이며, 현대 사회는 수렁 같은 배설물 위에 불안하게 서 있거나 앉아 있다. 그의 작업은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욕망에 대한 문제적 질문이다. 질문이되 대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라 환기시키는 질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독자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하는 질문이다. 작가는 죽음으로 만든 꽃을 들고 인류의 미필적 고의에 대해 묻는다. 작가는, 살아간다는 게 사실은 숱한 추함과 죽음을 만드는 일임을, 만화경 같은 꽃으로 환기시킨다. 원동민의 작업은 환기이고 질문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종의 대속(代贖)으로 읽힌다. 인류가 생존과 존재를 위해 운명적으로 생산한, 미래에도 여전히 생산할 수밖에 없는 지상의 많은 ‘죽음’에게 보내는 참회의 이미지가 곧 그의 작품인 것이다.

 

    <flower> 연작은 불교의 윤회의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윤회사상은 죽음을 긍정한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명의 완결이고 새로운 생의 시작이라는 절실한 깨달음, 그 깨달음의 열매가 곧 윤회사상이다. 그래서일까? 원동민의 어떤 작업은 만다라를 연상시킨다. 만다라는 불법(佛法)의 모든 덕을 갖춘 경지를 뜻하는 말인 동시에 그 경지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원동민의 작업은 윤회와 만다라를 동시에 품고 있다.

    죽음의 예술화는 생과 사에 대한 숭고한 탐색이다. 칸트는 숭고함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사람을 매료시킨다고 말했다. 칸트의 언어로 말하면 죽음과 생명을 이야기하는 원동민의 작업은 아름답기보다는 숭고하다. 숭고한 환기이고 질문이고 공명이다.

 

    2500년 전에 이미 플라톤이 말했듯이 모든 예술은 허구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예술의 가치를 부정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짜 안에 진실이 있다고 믿었으므로 예술을 긍정했다. 그렇다. 허구이지만 반대로 허구인 까닭에 예술 안에는 금쪽같은 진실이 있다. 예술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해주고, 듣지 못한 것을 듣게 해주고, 미처 알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해주는 그 무엇이다. 그 예술을 들고 원동민이 우리에게 묻는다. 소비는 무엇이고,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다시 묻는다. 죽음은 무엇이고, 삶이란 또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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